일요일 오후, 할 일이 너무나도 없어서 적어보는 글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건 정말 우연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어찌 보면 본능처럼 가장 잘 맞는 직업을 찾은 게 아닐까?
1. 피아노와의 만남
8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2000년 7월 군자동에서 암사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아마 방학이라 학교를 아직은 다니지 않았을 때로 기억하는데,
집에서 무기력하게 뒹굴고 있을 때,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찾아왔다.
신축 아파트였기에 새로운 학생들을 모집하려고 발품을 팔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선생님을 따라서 학원에 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히 부모님과 얘기는 되어있었지 싶은데
당시에는 그냥 학교 가듯이 갔던 것 같다. 재밌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기 싫지도 않은..
그때부터 나는 시키면 그냥 했던 아이였나 보다
그렇게 10년 정도를 배웠다. 중간에 관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 아마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전공은 하지 못했는데, 사실 당시에 이미 현실의 벽을 알고 있었다.
일류 피아니스트는 아니더라도 그럴듯한 피아니스트조차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았고, 음악을 전공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 지도 정확히는 아니었지만 정말 크다는 것도 알았고, 내가 지독한 새가슴이라는 것도 알았다.
나는 늘 그래왔다. 축구도 바둑도 미술도.. 그 외 대부분의 것들에서 평균보다는 앞서 있었지만, 그 말은 반대로 말하면 특출난 게 하나도 없었다는 뜻이지 않은가
(하.. 근데 또 쓸데없이 길게 쓰고 있네.. 그래서 조율이 왜 너한테 맞는 건데 ㅡㅡ)
뭐 아무튼 결론은 비록 피아니스트는 아니더라도 피아노를 오래 배웠기 때문에 피아노랑 굉장히 친했고, 조율을 함에 있어서 피아노를 배웠다는 것이 단순히 음을 맞추는 것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더 중요한 건 덕분에 건반을 터치하는 느낌을 조금 안다는 것이다. 이건 조율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추후에는 분명히 도움이 되는 부분이다.
2. Handwerk
분명히 기억한다. 나는 커서 공부하는 직업을 가지지 않겠다고 늘 말해왔다. 그럴 때면 부모님께서는 공부하지 않는 직업을 없다고 하셨는데, 그건 맞는 말이었지만 내 의도는 그런 뜻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공부가 그냥 책상 앞에서 책 들여다보고 있는 걸 의미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나는 뭔가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 뜻과는 다르게 어렸을 때의 나는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공부를 (책상 앞에 앉아서) 죽어라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무슨 일을 하든지 일단 성적을 잘 뽑아 놓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부모님이 교사였기 때문에 그랬는 지도 모른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죽어라 하진 않았네 ㅎㅎ 하지만 (나름) 열심히 했고 대충 중학교 때부터 6년 정도 해보니까 더욱 느껴지는 게, '이건 나랑 안 맞지 않는다'였다.
Es wird wieder so ein langer Text....... scheiße
또! 아무튼 나는 나에게 맞는 Handwerk를 찾았고, 좋다! 아무튼 좋다!
3. 아주아주 작은 쥐꼬리만 한 재능
조율을 처음 배울 당시, 선생님께서 '끼가 있다'라고 하셨다. 물론 그 말은 당시에 나로 하여금 수많은 오만함을 야기했지만, 어쨌든 내가 조율을 계속 배워가는 데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의미는 없는 것 같다.
그 쥐꼬리만 한 재능으로 처음에는 꿀을 좀 빨았는 지도 모르지만 지금 와서는 의미가 전혀 없으니.. 지금부터는 멈추면 끝이다. 며칠 전 예능프로 '맨인유럽'을 보는데 거기에서 파트리스 에브라가 이런 말을 남겼다.
'축구선수 인생은 스프린트가 아니고 마라톤이다'.
조율사 인생도 똑같다. 사실 뭘 하든 똑같을 것이다. 재능이고 나발이고 그냥 끝까지 달리는 자가 승리한다.
4. 나는 고독함이 좋다
조율은 고독하다. 나와의 싸움이다. 피아노는 정직하다. 피아노를 조율하는 것이다. 피아노와 의견 조율을 할 필요는 없다. 피아노는 말이 없다. 요구 사항은 명확하다. 오로지 내 능력으로만 완성하는 일이다. 그런 점이 좋았다.
아마 내가 대학에서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다면, 연봉을 1억씩 줘도 못 버텼을 것 같다. 혹은 짤렸을 지도..????
하지만 조율은 그런 거 없죠?? 그냥 내 능력만 좋으면 다 된다. 그게 좋다
5. 더운 날 시원한 곳에서, 추운 날 따뜻한 곳에서
누가 말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급식 시절 한 선생님이 자주 강조하던 말이다.
공부 열심히 해야 더운 날엔 시원한 곳에서 에어컨 바람 쐬며 일하고, 추운 날엔 따뜻한 곳에서 히터 빵빵하게 켜놓고 일한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선생님과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실천하고 있다.
조율을 실외에서 할 일은 정말 거의 없다. 인생에 한 번쯤은 길거리에 있는 스트리트 피아노를 조율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normalerweise 조율은 실내 작업이다.
물론 지금 일하는 회사의 작업실은 여름에 드럽게 덥지만..
6. bis 100 Jahre alt
나는 진심으로 믿는다. 내가 100살까지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조율은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현재 이종열 명장께서 몸소 증명하고 계신다.
물론 그전에 내가 귀머거리가 될 수도 있고 like Beethoven,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70살 전에 죽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회사원처럼 40대에 권고사직 당할 일은 NAVER! 없다.
7. AI-frei
AI의 시대가 도래한다.. 하지만 조율은 99.9% 안전하다.
일단 이 일은 AI가 할 수가 없다. 백번 양보해서 조율은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근데 이 마이너한 분야에 AI를 접목시키는 건 정말 바보임에 틀림없다.
물론 세상 발전에 뒤처질 수는 있겠지만..
나는 내 길을 간다.
Ich gehe meinen W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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